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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겨울나비 2016. 10. 16. 06:19















우리 결혼합니다!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아주 평화로운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농사는 풍년이었고, 왕은 현명하게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왕국을 가장 행복하게 했던 것은 올해로 15살을 맞이한 한 떨기 꽃과 같은 공주님이었답니다. 공주님은 무럭무럭 자랐고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그런 공주님을 아주 아꼈답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왕국에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온 몸에 칠흑 같은 망토를 두른 무시무시한 마왕이 군대를 이끌고 왕국으로 온 것입니다. 마왕은 가장 먼저 공주님을 자신의 성으로 납치하고 자신의 부하들을 인간계로 보냈습니다. 마왕의 부하들은 마을을 습격했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평화로웠던 왕국은 점차 황폐해지고 백성들도, 왕궁 사람들도 매일매일을 절망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젊은 용사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용사는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님을 구해오겠다며 왕의 앞에서 다짐을 했습니다. 왕은 용사에게 가장 좋은 무기와 방어구들, 그리고 용사를 도와줄 많은 병사들을 내주었습니다. 젊은 용사는 왕에게 하사받은 무기를 들고 마왕이 사는 마계의 성으로 향했습니다. 마왕의 성에 도착하기 까지도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려, 드디어 마왕의 성에 도착한 용사는 곧바로 마왕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습니다. 해가 3번 뜨고 달이 4번 질 동안의 긴 싸움이었습니다.

 마왕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용사는 마침내 붙잡혀 있던 공주를 구출해 왕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용사에게 막대한 양의 상금을 내렸고 온 세상은 그를 칭송하며 축제분위기였습니다. 용사는 이윽고 모두의 축복 속에서 공주와 결혼을 하여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후 공주와 용사는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는 것이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용사이야기이다. 물론 현실은 잔혹하다. 잔혹하다 못해 태클이 끊이지 않는 이상한 이야기다. 선량한 왕은 사실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마족들과 손을 잡고 있었고, 공주는 붙잡히기는커녕 마왕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들었다. 선택받은 단 한 명의 용사 대신 75명이나 있으며, 게다가 무시무시한 마왕의 정체는 사실 한 왕궁전사의 아버지이자, 그 왕궁전사의 친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용사는 마왕을 쓰러뜨렸고, 왕국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마왕을 쓰러뜨렸지만 용사는 늘 바빴다. 이 이야기는 그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린 이후의 있었던 이야기이다.

 내 이름은 알바 프류링. 통칭 레드폭스라 불리기도 하는 나는 세상을 구한 용사이다. 절대로 허풍이 아니다. 물론 혼자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을 펴고 세상을 구했다고 말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내가 사는 왕국 곳곳에는 내 동상이나 기념품들을 팔고 있고, 나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상연되기도 한다. 매달 월간 알바라고 하는 이상한 잡지가 팔리고 있고, 나와 같은 용사를 양성하기 위한 용사학교가 전국에 건립되고 있다.

 마왕을 쓰러뜨린 후의 나는, 잠시 본업인 용사를 쉬고 있다. 물론, 쉰다고 해도 아예 검을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요청에 따라 종종 아주 멀리까지 일을 나가기도 한다. 지금 나한 때 나의 왕궁전사였던 로스―본명은 시온이지만 가명으로 쓰던 이쪽이 더 익숙해져버렸다―와 함께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 무엇을 연구하냐고? 그거야 당연히 평행 세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간섭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로스의 형인 레이크를 구하기 위한 싸움에서 나와 로스는 엘프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석연치 않은 말과 함께 사라져 버린 엘프의 뒤를 나는 쫓고 있었다.

 로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마법도 아직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혼자서 뭘 할 생각이냐며 실컷 얻어맞은 다음, 본인도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내가 로스는 그럴 필요 없이 이제 시실리씨나 레이크군과 함께 같이 지내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런 나의 말에 로스는,

‘머리가 나쁜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 밖에 못하니까요. 용사씨는 평생 용사밖에 못하겠네요. 당신 같은 바보랑 같이 있었더니 바보가 옮아버린 것 같습니다. 평생 책임져주세요’

 라 말하더니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로스와 함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집을 마련해 준 것은 왕궁의 히메쨩으로, 그 동안 받았던 도움에 대한 소소한 답례(이것이 국가 권력!) 라고 했다. 그래서 올해로 로스와 같은 집에서 생활한지가 어느 덧 3년이 넘었고, 여전히 연구에는 큰 성과 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로스와 동거라니!? 라면서 처음에는 여러 의미로 불안했지만 마치 가족처럼 지금은 완전히 익숙해지고 있다. 매일 아침 로스가 만들어주는 아침은 맛있고, 가끔 연구에 진척이 없어서 움츠러들었을 때 로스가 엄청난 독설과 함께 타주는 달콤한 코코아는 여러 번 나를 구해주었다. 때때로 로스의 부탁(협박)으로 자료 수집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싸웠던 많은 동료들은여전히 시끌벅적하고, 용사학교의 후배들은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하다. …아니 방금 발언은 정정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래가 걱정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도 분명 세계 정복을 하겠다고 난리치는 마왕도, 마족도 앞으로 없을 것이고 내가 다시 진심으로 싸울 날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용사인 나는 조금 쓸쓸하지만, 분명 이것도 용사이기에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라 생각한다. 분명 그 날 아침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스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날 아침은 토스트기에서 구운 통밀빵, 그리고 로스의 취향대로 반만 익힌 계란 프라이, 프라이펜에서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 나는 설탕을 넣은 우유를, 로스는 블랙 커피였다. 로스는 사실 단 걸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커피는 늘 블랙이다. 처음 같이 살 때는 실수로 내가 마시는 것처럼 로스의 커피에 우유를 탄 적이 있었다. 물론 그 후 로스는 너무나도 환한 미소로 내가 마시는 모든 음료(물도 포함해서)에 도저히 마실 수 없을 정도의 설탕을 부어놓았다. 문제는 로스도 나도 같은 집에 살고 있는 탓에 그 반동이 로스한테까지 돌아오는 바람에 둘 다 얼굴이 새하얗게 된 다음 오늘 저녁은 외식으로 합시다, 라는 로스의 말에 앞으로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 둘 다 얻었었다.
 요리는 기본 로스가 담당하고 있다. 당신에게 맡기는 것은 재료에 대한 실례라며 독설을 날리는 주제에, 가끔은 용사씨가 만드는 요리가 먹고 싶다며 조르기도 한다. 부드럽게 말해서 조르기지 새벽 5시에 앙미츠가 먹고 싶다며 잠자는 사람의 명치를 걷어차는 것은 어떨까싶다.

 아침에 약한 나대신 로스가 아침을 준비하는 대신 저녁은 내가 준비한다. 집안일도 제대로 분업해서 하고 있다. 둘 다 귀찮거나 힘들 때는 마법으로 해결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실수로 마법에실패해 지붕을 날려버린 뒤로는 자제하고 있다. 2층에 있던 내 방에서 내려오자 분주히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로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식탁에는 제대로 내가 먹을 아침까지 준비되어있었고 로스는 자신이 먹을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로스의 뒤를 향해 아침인사를 건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바닥에는 신문이, 그리고 겸사겸사 우체통도 확인해보니 편지 몇 통이 들어있었다. 종종 멀리 여행을 떠나신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오거나 크레아씨로부터 편지가 오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보기 드문 고급스러운 편지가 하나 있었다. 표지에는 알바 프류링과 시온이라는 이름이 멋스럽게 적혀 있었고 나는 갸우뚱거리며 편지와 신문을 챙겨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로스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들고 온 신문과 편지를 식탁 한 쪽으로 치우고 차려진 아침 식사에 시선을 빼앗겼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소한 냄새와 로스의 커피향기가 뒤섞인 평화로운 아침, 나와 로스는 둘 다 손을 마주 모으며 잘 먹겠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로스는 가장 먼저 빵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따뜻한 우유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내 취향에 맞게 제대로 설탕이 넣어져 있는 달콤한 우유였다.

 예전에는 내가 따로 설탕을 넣었지만 어느 새인가 로스가 먼저 설탕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로스의 커피는 제대로 끓일 줄 안다. 설탕을 전혀 넣지 않는 진한 블랙커피에 아주 달콤한 케이크나 앙미츠를 같이 준비해가면 '바보주제에 조금 성장했군요' 라면서 말하고 내 갈비뼈를 부러뜨리러 오는 로스를 볼 수 있다.

'뭔가 우리 꽤 좋은 콤비 같은데…?‘

 실제로 로스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낸 것은 처음 만났던 그 때와 지금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루키가 파티에 들어왔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로스와 1년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재회한 로스와는 곧바로 헤어졌고, 가정교사로서 나를 한 달에 한 번씩 봐주더니 마법 제어가 완벽하게 되자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한 거였으니까, 아마 지금의 동거가 가장 긴 것 같다. 그런 것치고는 우리 둘의 호흡은 딱 맞는다. 말 그대로 용사와 전사, 최고의 팀이 아닐까? 힐끔, 로스 쪽을 보자 이쪽의 시선에는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옆에 둔 신문을 묵묵히 읽고 있었다.

‘음, 오늘도 딱 적당한 온도네.’

 우유를 마신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아침을 먹으려 포크를 들고 접시로 시선을 돌리자 내 접시에는 로스와는 다른 구성이 추가되었다. 덜 익은 계란 프라이 위로 붉은 케챱으로 아바라라고 적혀있었다. 일부러 무심한 척 멋지게 신문을 읽고 있는 주제에, 로스는 여전히 이런 장난들을 좋아한다. 나는 그런 로스가 가끔 나보다 어린 애 같은 면모를 보이는 것이 너무나 귀여웠다. 물론 본인한테 이 이야기를 하다가는 내일 아침에 내 아침은 없을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로스가 호호 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러고 보니 용사씨,라며 운을 띄었다.

"용사씨, 내일 결혼식 말인데요."
"…응? 결혼식?"

 포크로 무심코 찔러 버린 계란 노른자에서는 줄줄 계란이 흘러 넘쳐서 아바라는 글씨가 점차 노란색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들려온 단어는 결혼식. 어라, 결혼식? 누가 결혼하던가? 라며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최근에 받은 청첩장은 없었던 기분이 들었다. 응, 그래서라며 가볍게 대꾸한 나는 다시 계란을 향해 칼질을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로스는 아무래도 역시 조금 앞당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라고 말을 이었다.

"음…그런가. 근데 누구 결혼식 말하는 거야?"
"하? 바봅니까? 거기 터진 계란 노른자만큼의 지능도 없는 겁니까?"
"아, 아니 그 정도는 있지 않을…어라, 계란 노른자에 지능 같은 게 있던가!?"
 
오늘도 성대한 태클, 이라며 굉장히 기쁜 미소를 띤 로스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접시에 있는 베이컨을 하나 강탈하더니(어째서!?) 바로 입에 넣어버렸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요, 라고 나에게 지적한 로스는 내가 허둥지둥 다시 태클을 걸자 만족한 미소로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2개 밖에 없는 베이컨 중 하나를 강탈당해 여유가 없어진 나는 보복을 할 심산으로 로스의 접시 쪽으로 재빠르게 포크를 향했지만 이미 수가 읽히고 있었는지 로스는 환하게 웃으며 포크로 내 손을 찍었다.

"저랑 내일 결혼하잖아요, 용사씨."
“겨…결혼…?"

 그, 여자랑 남자랑 하는 그 결혼 말하는 거야? 웨딩드레스라던가 꽃 뿌려주는 그 결혼? 연이은 질문에 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에 또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태클을 걸려는 순간,

"이미 혼인 신고서도 작성했습니다!"
"뭐!?"

 로스는 기다렸습니다! 라는 표정과 함께 미리 준비해둔 종이를 꺼내어 식탁에 펼쳐두었다. 그러면서 먹고 있던 내 아침 식사가 걸리적거렸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쓱 치워버렸다. 푹신푹신한 카펫 탓에 그릇은 깨지지 않았지만 기껏 로스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저거 치우는 거 분명 나겠지, 그것보다 내 아침인데!? 아직 맛도 제대로 못 봤는데 아쉽잖아! 라고 숨 가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 만 가지의 태클을 애써 달래며 일단 로스가 내민 혼인신고서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진짜 혼인신고서에...내 이름....내...서명!? 증인 서명에 부모님까지!?"
"장인어른 찾는 건 큰일이었죠."
"장인어른!? 그것보다 난 이런 건 쓴 기억이 없는데!?"
"무슨 소리에요, 이 집에 들어올 때 제대로 싸인 했잖아요."
"집에 들어올 때...?"

 으으..언제였더라,
 아, 내가 이사 온 첫 날의 일이었다. 확실히 나는 여러 가지 서류에 서명을 한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서류를 준비한 것은 로스였다. 먼저 같이 살자고 제안한 것도 로스고, 그 후 히메쨩과 협력해 이 집을 구한 로스는 반 협박으로 가구나 기타 여러 등등을 준비시킨 모양이었다. 내가 따로 챙겨올 물건이 없을 정도로 이 집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명의라던가 세금과 관련해서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호적이 불확실한 로스 대신에 내가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내가 모든 서류에 사인을 했는데,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제대로 내용을 읽지 못하고 로스가 사인하라고 한 부분만 찾아서 사인을 했었다. 설마 그 서류 중의 하나가 혼인 신고서였단 말인가.

"정답입니다!"
"말도 안 돼!"
"정말 결혼식 준비를 혼자 하려니 힘들었네요!"
"하!? 진짜로 준비한 거야!? 무슨 생각이야!? 로스하고 내가 결혼이라니!!"
"일단 용사씨는 유명인이니까, 괜히 미리 발표하면 시끄러워 질 것 같아서 당사자한테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제대로 청첩장은 제가 돌렸습니다!"
"아니, 당사자한테는 알려야지!!"

 엣, 그런 겁니까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로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연기에 속을 리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주르륵 연달아 일어나자 간만에 용사로서의 태클 본능이 마구마구 일어나고 있었다. 로스는 그런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아, 라며 작게 탄식을 내뱉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걸로. 내일 결혼식장에서 뵙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결혼식장에 가서 미리 준비를 해야해서. 아, 여기 청첩장."
"응, 고마워…가 아니라, 이거 나와 로스의 청첩장이었던거냐고!?!"

 아까 내가 우체통에서 꺼내온 고급스러운 종이는 정말로 청첩장이었다. 그것도 아무리 봐도 어엿한 청첩장. 하얀색의 고급스러운 종이봉투에는 멋스러운 내 이름과 로스의 이름이 적혀있고 웨딩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아까는 미처 웨딩이라는 단어를 보지는 못했었다. 내가 놀라하자 로스는 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니 반으로 접힌 청첩장이 나왔다. 모두의 축복을 받아 저희 둘이 결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한 청첩장은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밑에는 장소와 일시, 그리고 나의 이름과 로스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나란히 적혀있었다. 결혼식 날짜는 내일, 그리고 장소는 마왕성이었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

분명 오늘 일일 치 태클은 이 종이에 전부 쏟아 부을 수 있을 것 같다. 로스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그런데 이 청첩장…뭔가 이상한 느낌이…?’

 손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그야말로 청첩장다운 질감이었으나, 용사로서의 직감이 무언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야 정체를 모르는 자신의 결혼식과 관련된 청첩장이나 위험한 건 당연하다고 하지만,

"어라, 로스…이거 왠지 마력 느껴지지 않…."
"아, 용사씨의 청첩장은 특수 제작된 거라 개봉 후 5초 후에 폭발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특별함 원하지 않아!!!"

 용사씨는 특별하니까요! 이라면서 재빠르게 폭발에 대비해 나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로스를 바라보며 나는 혼신의 태클과 함께 게이트를 열어 집 밖으로 청첩장을 던져버렸다

“하아…하아…아침부터 이게 무슨…”

 던져진 청첩장은 정말 잠깐의 틈을 두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해버렸다. 만일 집에서 이게 터졌다가 지난 번 내가 마법에 실패해서 지붕을 날린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집 통째로 날아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이 집 왕국 소속이니까 망가뜨리면 변상 해줘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그것보다 이런 편지 한 장에 그 정도 규모의 마법을 숨겨두다니, 역시 마법의 기교에 대해서는 아직 나는 로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가 다시 한 번 느꼈다.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자, 그리고 이걸 응용하면―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로스! 너 말이야, 결혼식이라던가 청첩장이라던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게다가 내일!? 내일이라니 또 무슨 꿍꿍이를―에!?"

 내가 로스를 찾으러 식탁을 다시 살폈지만 로스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당황한
내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로스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식탁 위에서는 '결혼식 준비하러 갑니다. 데헷☆ 내일 식장에서 봐요'라는 로스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아까의 소란 덕택에 내 아침은 차갑게 바닥에 처박혀 있고, 배고픈 내 배는 꼬르륵하고 눈치 없게 울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오늘 아침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렬한 태클과 함께 나는 로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 * *

 마왕. 말 그대로 마족들의 지배자. 그 생김새를 자세히 본이는 없지만 전해지는 소문에 따르면 칠흑까지 검은 망토에, 머리 위에는 무시무시한 뿔이 달려있고 그 몸집은 태산만하다고 한다. 마왕이 웃으면 그 웃음소리는 대지와 하늘을 뒤흔들고 마왕이 고함을 치면 천둥 번개가 지상으로 내리친다고 한다. 마왕은 마계에 있는 성에 사는데 그 성 역시 견고하기로는 이 세상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 튼튼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략에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각 층에는 마왕만큼 무시무시한파수꾼들이 지키고 있고, 설사 끝까지 돌파한다고 해도 최상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왕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요새는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아, 최근에 마왕 잡지도 나왔어! 월간 마왕이라고 하는 잡지인데, 알바씨! 구독하고 있어?"
"로스가 저번에 얘기했던 잡지가 그거구나. 다음에 볼게."

 내가 마왕을 봉인한 이후, 마계와 인간계는 비밀리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서로의 세계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 그렇지만 만일 양 세계의 크나큰 위기가 닥쳤을 때는 상호간의 협력을 도모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사 알바에 대한 양측은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의 세 항목이다. 그 외에도 무역이나 관광에 대해서 몇 차례 이야기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평범한 인간인 나는 알 수가 없다. 사실 처음에 나에 대한 마지막 조약을 전해 들었을 때는 어쩐지 양 쪽 세계에서 쫓겨나는 전개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치외법권 같은 것이라고 한다. 마계도, 인간계도 나에 대해서는 어떠한 참견을 할 수없는 조약. 먼저 제시한 쪽은 인간계의 공주인히메쨩, 그리고 그 조약에 동의한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새롭게 즉위한 마왕님이다.

"다음에는 마왕일가의 새로운 후계자로 알바씨를 인터뷰할거야!"
"나는 인간이고! 마왕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니까!!"
"에―! 그치만 월간 알바에서는 특집으로 마왕에 대해 파헤친다면서 마왕을 퇴치한 용사 알바와 전격 인터뷰라던가 하면서 잡지 매상을 엄청 올렸는 걸! 우리도 질 수 없지!"
"그런 인터뷰 한 기억 없는데...토류인가..."

 그리고 현재 마계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3대째 루키메데스, 루키쨩이다. 공식 석상에서는 검은 망토를 애용하지만 평소에는 하얀색의 로브를 입고, 머리 위의 뿔은 없지만 기분에 따라 파닥거리는 작은 검은 날개가 달려있다. 물론, 몸집은 보다시피 평범한 어린 아이의 체격이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키가 컸다고 본인은 주장하고 있으나, 나나 로스가 볼 때는 전혀 변화가 없다. 오히려 동생인 린 쪽이 훨씬 더 성장했던 것 같다. 원래라면 루키의 아버지인 2대째 루키메데스가 마계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무려 결혼 천년 하고도 몇 주년인가를 기념하여 부부동반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은 부재중이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흘러간 거지…"
"그거야 알바씨한테 할 이야기가 잔뜩 있는 걸! 알바씨는 요새 마법 연구하느라 거의 방에 틀어 박혀있고, 작년 내 생일 때는 아주 잠깐 있다 간데다가 이제부터는 더 보기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미뤄둔 이야기를 다 해야 해! 아, 걱정마, 알바씨! 결혼식장은 마왕성이니까 시간 맞춰 보내줄게!"
"아, 그건 정말 미안…이랄까, 결혼! 맞다, 결혼 얘기 하러 온 거였다!!!"

 마법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지난 3년간, 나는 거의 방에서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나마 로스와 함께 외출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루키는 생일 때문이라도 1년에 한 번씩은 만났지만 다른 동료들과는 집들이를 한 다음 이후로는 별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여튼, 그런 내가 왜 갑자기 마왕성에 사는 마왕님을 만나러왔다고 하면, 무려 내일이 내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식장은 마왕성. 그 주모자이자 원흉이었던 로스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고, 어떻게든 마법으로 쫓으려고 하자 내가 갖고 있던 로스의 메모의 뒤편으로 새롭게 ‘방해하면 바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라는 글씨가 굼실굼실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사라진 로스를 뒤쫓아서 사건에 대해서 추궁하겠다는 나의 첫 번째 계획은 바로 무산되어 지금은 로스의 이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대해 단서를 얻을까 싶어 아무래도 로스에게 협력을 한 것 같은 루키를 만나러 온 것이다.

"참고로, 알바씨 드레스는 정말 굉장해! 주문 제작이야!"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머리를 싸매고 절망하는 나를 무시한 채 루키는 그야말로 마왕처럼 큭큭큭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장난에는 루키도 본격적으로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드레스? 그것보다 내가 입는 건가, 아 분명 로스가 신이 나서 준비했을 광경이 내 눈에 선했다.

"알바씨, 알바씨, 결혼을 앞둔 심정은 어때?"
"음, 뭐랄까…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긴장이 된다고 할까? …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떻게 하면 로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내일 결혼식을 회피할 수 있을지가 지금 가장 큰 고민인데!"

 그 말에 루키는 놀란 듯 눈과 날개를 깜빡거렸다.

“에,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정면에서 부정당했다!”

 농담이라며 루키는 손사래를 쳤지만 방금 전 눈은 진심이었다. 루키쨩, 안 본 사이에 훌륭한 마왕으로 성장했구나. 같이 여행을 해왔던 동료로서 이런 루키의 성장을 기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하기에는 내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여기에 만약 나나 루키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제 3자가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친구끼리 장난으로 청첩장 보낸 정도로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상대는 바로 로스입니다!’라고

 로스를 만난 사람이라면 아마 1분도 지나지 않아 로스의 성격에 대해서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전설의 도S용사라고 어떤 사람이 말하듯, 로스는 다른 사람의 절망에 찬 얼굴을 보는 것이 취미이자,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대답한 녀석이다.

 이미 나는 수차례 로스의 수법에 걸려 차마 입에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로스라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자신이 결혼하는 한이 있더라고 가짜 결혼식을 준비해서 내가 당황하고 절망하는 얼굴을 하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로스가 청첩장을 준비했을 때, 나도 설마 아무리 로스라도 그렇게 까지 준비할까라고 자문해보았지만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로스라면 가능하다. 루키의 말을 듣는 한, 아무래도 이미 의상이며 장소며 요리며 전부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도망칠 구석이 없다. 애초에 도망친다해도 로스한테 붙잡혀서 식장으로 끌려올 결말이 눈에 선하긴 하다.

"알바씨?"

 그나저나 결혼인가.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기 전에 결혼을 먼저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와서 부끄러운, 아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나는 용사로서 세상을 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연애라던가 그런 쪽은 전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정말이다. 나는 연애를 어쩔 수 없이 안 했던 거지 절대로 못 했던 것이 아니다!

"저기~? 알바씨~?“

 하지만 로스의 경우는 나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로스는 잘생겼다. 크레아씨도 그렇지만 사실 천 년 전의 사람들은 다 잘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녀석이지만, 한 명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걸 정도로 멋있는 면도 있다. 게다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는데다가 심지어 요리까지 잘한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을 리가 없다. 실제로 나랑 로스가 같이 처음에 여행을 다닐 때에 로스는 몇 번이나 여자들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다. 마왕토벌 여행 중이라며 전부 거절하긴 했지만 지금이라면 분명 누군가와 사귀어도 이상하지 않다.

“알바 프류링!”

 동거를 시작한 지 3년이 넘었지만 로스에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런 방면은 잘 몰라서 눈치를 못 챈 것일 수도 있다. 어라, 만약 로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은 로스와 같이 살고 있지만 만일 로스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설마 셋이서 같이 살지는 않을 거고, 그러면 나 쫓겨나는 건가? 반대로 로스가 집을 나가는 일이 생기는 건가? 로스와 같이 살 수 없게 되는 건가.

‘…그건 뭔가 싫어.’

 기분 탓인지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치 요동치는 것처럼 꿈틀꿈틀거리는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뭘까, 이 느낌은…설마

“우와아아아앗!
“꼴좋다, 이 빌어먹을 동정용사!”

 마왕의 말을 무시하면 이렇게 되는 거라고! 라고 기운차게 소리친 루키의 목소리와 함께 나의 몸은 어느 새인가 바닥에 나타난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여가는 감각과 함께 갈비뼈의 강렬한 통증이 나를 곧이어 덮쳤다. 눈을 깜빡거리며 이게 루키의 게이트(그것도 아무리 봐도 갈비뼈를 중점적으로 노리고 있는 듯한)라는 것을 파악한 순간, 다시 공중으로 몸이 떠오르더니 내 눈에는 루키가 눈에 보였다.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있던 루키의 머리 윗부분이 보였다. 순식간에 나는 아주 높은 천장까지 올라와있었다.

 침착하게 갈비뼈에는 회복 마법을 걸고 구멍이 사라짐과 동시에 별 다른 마법 없이 가볍게 몸을 굴러 착지하자,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루키의 목소리에서 칫하고 노골적인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루키의 표정을 보니 천 년만의 봉인에서 풀려난 무시무시한 마왕보다 훨씬 더 차갑게 식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바씨, 너무 강해져서 재미가 없네~"
"아하하…"

 그 미소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때로는 로스의 무서운 미소보다 루키의 이런 미소가 더 무서울 때가 있었다.

“기껏 이 마왕 루키메데스 3대째가 어리석은 용사에게 힌트를 주려고 했는데”
“힌트?”

 먼지를 털면서 다시 루키의 맞은편에 앉자 루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결혼식을 알바씨랑 로스씨 둘 다에게 있어서 최고의 결말로 할 수 있게 만드는 힌트”
“그런 게 가능한 거야!?”

 내일 결혼식을 도망친다면, 분명 로스가 날 잡으러 온다. 그리고 내가 순순히 결혼식에 참가한다고 해도, 분명 그 결혼식은 평범한 결혼식이 아닐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것도 아마 용사의 직감. 루키의 말에 나는 조금의 희망이 보인 듯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둘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루키의 힌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키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로스씨가 원하는 말을 해주면 돼.”
“로스가 원하는 말…?”

 아니, 모르겠는데. 곧바로 그렇게 대답한 나를 보고 루키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니까 알바씨는 평생 동정인거야.”
“아니,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알바씨는 정말 용사로서, 친구로서는 최고지만 말이야……."

 루키는 방금 전과는 다른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키는 이제 귀찮다는 듯 나에게 손사래를 치며 이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아직 힌트의 의미가 뭔지 모른다고 대꾸하자 그런 건 마왕한테 듣는 게 아니라 NPC한테 듣는 것이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알바씨, 돌아가기 전에, 부케는 내가 받아도 되지?”
"부케!?“

 방금 전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나!? 어째서 결혼식이 무사히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까? 숨 가쁜 태클에도 루키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 결혼식이면 당연히 부케는 나나 크레아씨겠지. 근데 크레아씨는 결혼식에 못 올 테니까 내가 대신 받으려고."
"어라? 크레아씨는 못 오는 거야? 지금 불꽃놀이를 배운다고 마을에서 수련 중 아니었던가??"
"으응..그렇긴 한데 아마 살아서는 못 올 거야."
"불꽃놀이 장인이란 게 그렇게 목숨이 위험한 직업이었던가!?"
 
로스가 목숨을 걸고 구한 소꿉친구인 크레아씨는 지금 여행하다 만난 불꽃놀이에 흠뻑 빠져서 지금은 장인 밑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로스가 말하길, 크레아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 하나만은 쓸 만했다고 한다. 종종 편지로 수행의 성과를 보내주지만, 로스의 말에 의하면 저번에는 성에 대량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바람에 성이 불탈 뻔 했다고 한다. 물론, 변상은 내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너무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바람에 그 때는 태클도 못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크레아씨가 결혼식에 불참이라니 의외였지만, 로스 성격에 그 바보는 안 와도 될 것 같은데요(폭소)라고 말하는 광경이 선했다. 여튼, 로스는 그런 성격인 것이다.

"저기, 알바씨. 이제 슬슬 나도 결혼식 준비를 하러 가야해서, 더 이상 알바씨랑 놀아줄 틈이 없는데.."
"아, 그렇네. 미안…이 아니라! 루키쨩!? 결혼식은 안 여는 쪽을 부탁하러 온 거였는데“
"알바씨, 아까부터 태클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조금 다물어줄래.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야기할거니까."
"으...응...응.."

 우와―, 마왕님 무서워. 분명 여행 중인 2대째 루키메데스가 있었다면 감격의 춤을 췄을 장면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에서 보면 뒤돌아서 있는 루키는 나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거기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는 확실히 마계를 통치하는 마왕, 그 자체였다.

"저기, 알바씨. 솔직히 말해서 알바씨랑 단 둘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감옥의 간수씨겠지만(아니야!) 그 다음은 알바씨네 어머니고, 아마 그 다음이 슬라임(그것도 아닙니다만!?)이고 아마 그 다음의 다음이 나라고 생각하는데,"
"태클 걸 곳이 너무…“

 나의 연이은 태클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루키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알바씨는 하나에 열중하면 다른 게 안 보이는 타입이야. 그야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못하는 수준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누구보다 더 잘하는 거니까 지금의 알바씨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알바씨가 나보다 약했던 시절(어라!? 그랬던가?)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알바씨는 말이야, 늘 열심히 하다 보니까 정작 중요한 건 잘 눈치를 못 채. 언제나 그걸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나나 로스씨였는데, 평소라면 내가 답을 알려줬을 거야. 이번에는 안 가르쳐줄 거야. 로스씨가 원하는 대답을 알바씨가 내놓지 않으면 내일 결혼식은 아마 알바씨의 장례식이 될 지도 몰라. 나는 두 사람이 다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알겠어? 알바씨, 나는 물론이고 모두 응원하고 있으니까."
"루키…쨩. 중간 중간 무시무시한 말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루키는 고개를 획 돌리더니 만면에 가득한 미소로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다.

"알바씨의 웨딩드레스 모습은 내가 제대로 사진 찍을 테니까! 아마 그게 알바씨의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겠네!"
"환하게 웃으면서 무시무시한 소리!!"

 결국 그 후, 루키는 결혼식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 채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한다며 나를 강제로 성 밖으로 쫓아내었다. 결혼식 당일 까지는 이제 마왕성은 출입금지라면서 단단히 주의를 받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내일 결혼식의 힌트를 얻기 위해 루키가 말한 NPC를 찾아 나섰다.

* * *

"요―! 이게 누구야?"
"아레스씨...."

 알바가 가볍게 공중에서 게이트를 이용해 성의 입구에 착륙하자,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히메쨩의 전속 메이드이자, 왕성의 메이드 장을 맡고 있는 아레스였다. 어릴 때부터 히메쨩을 돌봐서 그런지 공주와 메이드장의 신분이라기보다는 서로 믿고 따르는 자매 같은 느낌이다. 메이드장이라는 건 아마 성의 메이드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 생각되겠지만 적어도 아레스는 그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인물이다.

 무거운 쇠로 만들어진 해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히멘담을 직접 개발하고 수리하고, 용사로서 히메와 같이 활약하기로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의 사람이다. 일하기 싫어하고, 돈을 밝히는데 다가 늘 뜬금없는 발언으로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히메쨩을 생각하며, 어른스러운 부분도 있는 사람이다. 듣기로는 성에서도 그녀를 흠모하는 수많은 메이드와 기사들이 있다고, 본인이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성문 앞이라고 하는데 경비가 한 사람도....'

 하지마리 성은 한 때 부활한 마왕, 루키메데스와의 대결에서 일단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그리고 또한 그 마왕을 부활시킨 마족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기도 했다. 그 이유가 왕이 흑막이기 때문이란 사실이란 것을 배제하더라도 이 성은 지나치게 경계가 느슨한 면이 있다.

 하지마리 왕국은 전쟁을 겪었던 것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 현재 왕궁에 있는 병사들 중에서 전쟁 경험이 있는 병사는 없고, 왕이 자기 마음대로 병사들을 뽑았기 때문에 사실상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지하에 있는 감옥이 본래의 기능을 잃은 지는 오래…라고 말하고 싶지만 놀랍게도 최근 5년간 이 곳에 가장 많은 투옥된 사람이 바로 알바 자신이다.

"여전히 이 성은 경비가 너무 허술한 것 같은데요……."
"전설의 용사인 레드폭스가 있는 나라를 쉽게 쳐들어올 녀석은 없기 때문이겠지. 뭐, 여차하면 네가 싸우면 되는 거고. 음, 그것보다 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아레스의 말에 알바는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바의 대답에 아레스는 별 반응 없어 역시 그런 가라며 하품을 내쉬고 있었다.

 레드폭스, 분명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들은 기분이 든다. 워낙 왕국에서 레드폭스 영웅담이라며 왕궁 곳곳에 퍼져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 중에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레드폭스라는 이름을 자칭하는 것도 조금 부끄러워졌을 정도다. 처음 레드폭스에 관한 책이 나왔다고 들어 일부러 모른척하고 서점에 가서 사온 적이 있었는데, 그 후 로스도 같은 책을 들고 오는 바람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같이 읽겠다고 펼친 책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예를 들자면, 용사 알바는 그 탄생부터 비범했다, 붉은 달이 뜨던 밤, 수많은 여우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어느새 갓난아기가 한 집의 앞에 놓여있었다 같은―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로스의 야유와 함께 책을 갖다버리려고 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레드폭스와 관련된 책이나 상품, 심지어 동상까지 어느 것도 용사 본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인세라던가…그런 쪽의 수입도 0원…하아….'

 딱히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다. 그런 알바와 대조적으로 오히려 로스는 알바의 이야기들을 왕궁에 판다던가, 직접 잡지에 투고까지 하는 등, 오히려 알바보다 더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심지어, 로스는 알바가 가지고 있던 쿠맛치를 팔려고까지 했다. 다행히도, 쿠맛치를 산 사람이 마침 샌드백이 필요해서 사려고 했던 히메쨩이었던 덕분에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 그거다. 너, 그 녀석은 내버려두고 왜 혼자?"
"그 녀석? 혹시 로스를 말하는 거라면, 지금 저도 찾고 있는 중인데..."
"맞다, 맞다, 너희 둘 내일 결혼하다고 했지, 축하축하"
"아니..저 결혼식은 로스의 장난이라서 저도 오늘 안 사실이라.."
"음?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축의금은 안 내도 되지?"
"아레스씨는 변함이 없다고 할까 굉장하네요."

 칭찬 한 번에 백만 원, 이라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손을 내미는 아레스를 보고, 왜 내 주위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없을까, 라며 알바는 한숨을 쉬었다. 아레스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리면 피곤한 일이 된다. 성에 온 목적은 아레스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성의 주인인 히메쨩을 만나러 온 것이다. 괜히 붙잡혔다가는 귀찮은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알바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나저나 히메쨩 만나러 온 거라면, 지금은 못 만날걸~? 웨딩 케이크 만든다고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데 실수로 내가 재료를 3번인가 엎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주방을 부숴버려서 지금은 방에 틀어박혀있어."
"에!? 그렇다면 얼른 어떻게든 해주세요!? 당장 내일 쓸 케이크라고요!?"
"그래서 일단 주방을 수리할 도구를 산다는 핑계로 도망쳐왔는데, 뛰었더니 목이 마르잖아? 그래서 경비한테 마실 것 좀 사오라고 시켰는데,"
"성문에 경비가 없던 것도 당신 탓이잖아!!"

 어라 말하고 보니 그렇네, 뭐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말자고, 소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웃는 아레스의 모습이 알바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 사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로스랑 성격이 조금 비슷하지 않나’

 본인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다면 씨알도 안 먹힐 테지만.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아레스씨가 메이드 장이란 게 믿겨지지 않아요."
"메이드장? 이런, 소년! 내 이름은 과학자X! 그런 시시한 일, 이제는 노 생큐라고!"
"죄송한데, 태클 걸 곳이 너무 많아서 슬슬 목이 아파질 것 같으니 그만둬주세요.."

 어라, 그거 큰일 아니야? 라면 진지하게 주머니를 뒤지더니 동전을 하나 찾아 알바의 손을 덥썩 잡더니 동전을 손에 꼭 쥐어주었다. 얼마 안 되지만 사탕이라도 사먹어, 가뜩이나 존재감도 약한데 목이 쉬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잖아, 라며 정말로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태클을 알바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이다. 게다가 평소라면 태클 걸 상대는 같이 살고 있는 로스뿐일 텐데 오늘 정말 오래간만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태클을 걸다보니 정말로 목이 조금 뻑뻑한 느낌이었다.

'알바씨, 연구에 틀어박혀서 거의 집에서 안 나오니까 얼굴 볼 일이 너무 줄었어!'

 방금 전에 만난 루키의 말이 다시 재생되었다. 아레스씨도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이라고. 보통 급한 용무는 게이트로 이동하고, 몇 번 의뢰를 받아 마물 퇴치를 하긴 했지만 그 것 외에는 거의 외출이 없었다. 필요한 재료는 로스나 루키에게 말하면 모든지 구해주었고 애초에 로스만 곁에 있으면 그 다른 것은 어떤 것도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이상하다. 뭔가 좀, 그것도 많이 이상하다. 로스만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니, 이 대사를 로스 본인 앞에서 말해준다면 측은한 눈빛으로 화장실은 같이 안 가 드릴 거예요, 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하다. 로스는, 나에게 있어서 대체 어떤 존재지? 친구? 스승? 동경하던 용사? 전우?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친구, 정말 소중한 친구는 많다. 알바 프류링 인생 최초의 친구가 로스였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루키의 입장이 애매해진다. 물론 루키도 소중한 친구이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루키와 로스는 다른 느낌이다. 같은 친구이지만 루키 쪽이 연하여서 그런지 동생처럼 귀엽게 해주고 싶은 느낌이라면 로스는 연상이니까 확실히 의지할 수 있다. 아니다, 아니야, 단지 그런 차이가 아니다. 뭔가, 더, 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다.

"오, 왔다왔다. 어이, 너희들 늦어, 여기 손님도 왔다고~? 아, 알바 소년, 돈 좀 빌려줘."
"돈도 없이 심부름 시킨 겁니까!?"

 정말이지, 내가 어째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신히 주머니를 뒤져서 경비병들에게 제대로 값을 지불해주었다. 그러자 경비병은 안심했는지 병을 아레스한테 넘기고는 그대로 성문을 지나쳐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나가면서 얼핏 아 이제 지쳤네, 오늘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휴게실에서 한숨 좀 부치고 오자고,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경비는 누가 맡는 걸까, 이 성!! 경비병에게 태클을 걸고 싶어서 가슴부터 살살 올라오며 목을 간지럽히는 충동과 싸우고 있는 알바를 보자 아레스는 별 반응 없이 무심하게 아, 그러고 보니라고 말을 꺼냈다.

"맞다 맞다, 너 한가한 것 같으니까 내 심부름 좀 부탁할게"
"에, 저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그 결혼식이라던가"

 아레스의 부탁과 결혼식 둘 중에서 어떤 게 더 번거로운가를 순간적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비등비등했다. 아무래도 내 안에서 아레스씨의 위험도가 점점 더 올라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 결혼식 때문이니까 역시 적임자잖아. 그게 케이크는 히메쨩 담당인데 나머지 요리는 포이포이한테 시켰거든. 포이포이한테 가서 케이크 준비가 안 될 것 같으니까 그 쪽에서 케이크도 준비해달라고 전해줬음 좋겠는데?"

"뭐 상관없는데…가 아니라 어라, 케이크 그렇게 간단히 포기해도 되는 건가요!? 저랑 로스의 웨딩 케이크인데요!!"
"소년, 어른들의 사정이란거야."
"이미 전말을 다 알고 있는데다가, 저도 어른인데요!?"

 켁, 정말로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목 쪽을 손을 가져다가 완화시키는 마법을 걸자, 아레스는 그 모습을 보더니 방금 전의 경비병들이 사온 병을 하나 내밀었다. 와, 맥주다. 차갑게 식힌 맥주병에는 물방울이 맺혀있고 손끝에 닿는 시원함이 꽤 기분이 좋았다. 설마 주는 건가, 아레스씨가 무보수로 뭔갈 주다니 오늘은 별일이 다 있네 라고 생각할 참에 아레스씨는 이거 오프너로 따야 하는데 오프너 좀 빌려줘 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병을 들이밀고 있었다. 성에 들어가면 있잖아요라고 대답하자 귀찮으니까라며 바로 대답했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순간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순간 손에 든 병을 놓칠 뻔했지만 아레스씨가 완전히 나한테 떠미는 바람에 맥주병을 껴안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진? 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레스씨는 음, 슬슬 한계겠네, 라면서 느긋하게 성 쪽을 바라보더니,

"그럼 전언 잘 부탁해~나는 히메쨩이 성을 다 부수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라면서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아레스씨는 성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레스가 달려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쿵쿵 거리는 소리가 성에서 울려 퍼졌다. 그 쪽을 바라보니 눈에 띌 정도로 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각과 시각을 강화하지 않아도 성 안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대충, 케이크를 실패한 탓에 자괴감에 빠진데다가 아마 그걸 위로해준다면서 루돌프씨나 미쨩 정도가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을 던지고 그 결과 히메쨩이 더 폭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과연, 이 왕궁의 경비는 히메쨩이 있으니 괜찮은 건가. 묘한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성이 요동쳤다. 익숙하달까, 아레스씨가 엉겁결에 넘기고 간 맥주만이 조금 귀찮은 짐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 히메쨩도 못 만 난거잖아!"

 지금 아레스씨를 쫓아 히메쨩을 만나러간다면, 가뜩이나 케이크 때문에 예민해있는 히메쨩의 눈앞에 당장 내일의 주역이 나타난 거니 멱살을 잡히더니 죄송합니다라며 그대로 실패한 케이크로 얼굴을 맞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응, 역시 히메쨩은 다음에 만나러오자. 여차하면 내일도 얼굴을 볼 테니까....어라!?

'....나 지금 내일의 결혼식이 치러진다는 전제 하에 모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거 아닌가?!'

 히메쨩을 만나러 온 이유는 히메쨩이 내일 있을 웨딩 케이크를 만든다고 루키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에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결혼식에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지만 그나마 그 중에서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게 히메쨩 이었다. 히메쨩 이라면 더 힌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대답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일단 포이포이씨를 만나서 이야기 하면 히메쨩과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차갑게 식힌 맥주를 게이트를 통해 집의 냉장고에 넣고 알바는 귀찮은 아레스의 심부름을 완수하기 위해 포이포이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오빠는 내일 있을 결혼식 준비 때문에 지금 없는데..."

 성과는 조금 떨어진 마을, 거기에는 포이포이의 집이 있다. 여전히 교사로서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이런 낮 시간에 부재중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유가 결혼식 준비라는 점에서 또 다시 알바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야, 아레스씨가 말한 대로 요리를 부탁했으니 지금쯤 그 일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집을 찾아온 건 실수였다.

 문을 열어준 포이포이의 여동생인 마루는 예의범절이 바르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알바에게 시원한 음료수까지 내어왔다. 마루는 포이포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레스의 부탁대로 전언을 전달하자, 최대한 빨리 연락해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축하드려요, 솔직히 동거하신다고 들었을 때는 뭐야 이 자식들 식도 안올리고 동거라니 역시 간이 크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마루쨩, 지금 마루쨩에 대한 내 인상이 엄청 바뀔 것 같은 느낌이야."
"오빠도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으니까. 분명 부모님의 반대라던가 뭔가 사정이 있어서 동거부터 시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사정이라니…그런 건 아무것도. 아, 일단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두지만 내일 결혼식은 로스의 장난이야."
"요새 대세는 결혼식보다 바로 도장 찍는 거긴 하니까요.."

 처음 새롭게 이사했다며 집들이 초대 받은 이후로 포이포이의 집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포이포이의 여동생인 마루는 굉장히 위독한 병에 걸려서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다고 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약을 쓰더라고 해도 그 병이 낫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의 심각한 병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지금은 건강한 몸을 얻었지만, 본래 마족의 몸인 탓에 루키와는 정기적으로 연락해서 마계 쪽에서 검진을 받는 모양이었다.

 알바는 마루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포이포이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 '친구를 구하겠다고 왕을 때려눕히고 마왕을 부활시키고 용사가 된 녀석이나 그 용사에게 인생을 전부 바친 녀석이나 제정신이 아니야, 둘 다' 라고 오빠가 말하면서 이것이 사나이의 우정이라고 하길래 제가 그건 사랑이라고 정정하면서 오빠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한 기억이 그저께 같은데, 드디어 결혼을…!."
"휴, 마루쨩. 잠깐 내 이야기랄까 태클인데 천천히 이야기 해줄 게. 일단, 포이포이의 말투와 몸짓까지 흉내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리고 일단 왕을 때려눕힌 것은 본의가 아니었어. 그 점에서 맞긴 맞지만 여튼 그리고 나는 로스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왕을 부활시킨 거지 일부러 마왕을 부활시키고 싶어서 말했다는 말투는 조금 그렇다고 할까. 아, 그리고 로스는 나한테 인생 같은 거 바치지 않았다고 할까? 오히려 크레아씨를 구하기 위해서 열심이었으니까 그쪽이겠지. 그러니까 나랑 로스는 정말 좋은 동료사이...야."

차근차근 항목을 설명해가며 태클을 거는 알바의 모습을 마루는 진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조그맣게 저게 소문의 용사 태클, 이라고 중얼거린 소리는 다행히도 알바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능숙하게 조목조목 태클을 늘어놓던 알바는 좋은 동료사이라는 부분에서 멈칫거렸다. 그런 알바의동요를 눈치 챘는지 마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쭈욱 아파서,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매일매일 상태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희미해진 의식 사이로 들리는 건 언제나 저를 걱정하던 오빠의 목소리였고, 딱 한 번이라도, 마지막이어도 좋으니까 오빠한테 고맙다고 전해주고 싶었어요."

"마루...쨩?"

 달그락 거리며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마루의 손은 그 때를 떠올리는지 새하얗게 질려있는 느낌이었다. 알바가 괜찮냐고 묻자 마루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루키쨩이랑 늘 알바씨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직접 만나면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라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는 오빠가 이 세상의 전부였고,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해요. 제 인생을, 빛을 되찾아 준거잖아요. 그것도 마족과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저를 구하려고 했어요. 그게 정말로 미안하면서 고마웠어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랑 오빠는 가족이지만, 로스씨랑 알바씨는 가족이 아니잖아요."

 아, 물론 결혼하면 호적상 부부로 등록되니까 가족이긴 한데, 라면서 신중한 얼굴로 덧붙인 마루였지만 알바가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난 지 십 년이 넘은 사람들도 하루면 서로 적이 될 수도 있고,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십 년 후에 그 운명보다 더 강렬한 운명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로스는 뭐랄까, 특별하달까. 처음 생긴 친구였다고 할까...어, 그리고 일단은 차가워보여도 상냥한 면도 있고..막 용사가 된 나를 이끌어 준 것도 결국 로스였고, 로스를 희생시켜서 얻은 평화 따위 내가 두 발 벗고 잘 수 있을…."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가족이라도 정말 힘든 일이니까요"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 토이펠씨나 2대째라던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고, 또 루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아, 만일 루키나 다른 사람이 로스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난 똑같이 할거야. 물론 마루쨩도. 포이포이씨가 분명...."

 포이포이의 이름을 꺼내자 마루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마 오빠라면 아마 중요한 타이밍에 그 자리에 없을 것 같다며 신묘한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런 마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알바는 무언가가, 아까부터 걸리던 무언가가 이번에는 가슴뿐만이 아니라 온 몸을 뛰어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로스는…나의, 그러니까 친구…일 텐데…….'

 소중한 친구, 라는 단어를 입에서 몇 번 굴려보지만 그대로 잘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양념이, 아니 양념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주재료가 통째로 빠진 것 같은 맹맹한 기분이었다. 로스와 루키가 다른 점, 둘 다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임에도 로스에게는 무언가 빠져있는 단어, 알 것 같으면서도 명확하게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단어.

“그, 그렇지만 그런 거라면 크레아씨도 있지 않을까? 로스랑 크레아씨도 사이가 엄청 좋잖아. 분명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동정용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마루는 조용히 루키쨩의 말한 그대로였다며 중얼거렸지만 마루의 말에 동요한 알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차를 대접받고 잠깐 10분가량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내 머릿속은 이미 혼란 그 자체였다.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오른 묘한 위화감들이 부지런히 내 입에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 말은 마치, 로스가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가 로스를…친구가 아닌 다른 의미로 좋아한다는 것과 같게 들렸다. 그럴 리가. 내가 눈에 띄게 머리를 싸매자 마루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그래서 로스씨도, 알바씨도 앞으로 계속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내일 결혼식도! 저도 오빠랑 늦지 않게 갈게요."

 오빠는 늘 중요한 장면에서 늦게 오니까 분명 결혼식 같은 행사는 제가 잘 챙기지 않으면, 이라고 웃는 마루는 이윽고 알바에게 내일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라며 재촉했다.

"아, 저기, 마루쨩, 나 하나만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이전에 일단 마루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어쩌면 히메쨩에게 들으려고 했던 그 힌트를 마루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은 어쩌면 그 대답을 이미 나는 진작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불행히도 나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한 번에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는 바보 용사라서 아직은 내가 로스한테 느끼는 감정의 차이에 명확히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기에는 내일 있을 이벤트가 나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루키가 내일 결혼식에 대해서 '로스가 원하는 결말'대로 하지 않으면 분명 둘 다 불행해질 거라고 했는데, 혹시 마루쨩은 '로스가 원하는 결말'이 뭔지 알고 있어?"

 그 말에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이며 결말..이라며 중얼거리던 마루는 이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결말이라면 이미 알바씨가 알고 있지 않나요?“
 
라고 당돌하게 입을 연 마루의 입에서는 역시나, 내가 기대하던 그 말이 흘러나왔다.

* * *

"와...우..."

 과연, 루키가 날 쫓아낼 이유를 알 것 같군. 곳곳에 띄어져 있는 기구들에는 축 결혼이라고 적힌 문구들이 늘어져 있었고 주변은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각지에서 모인 좌판들도 가득해, 결혼식이기라기보다는 거의 마계의 축제 규모였다. 루키가 아마 용사 알바의 결혼식이라고 마계에 대대적으로 선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정도의 인파는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심경과 함께 알바는 익숙한 길을 따라 마왕의 성으로 걸어 나갔다.

 어제 나는 마루를 만나고 그 후에도 결혼식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났다. 크레아씨랑 그리고 침착해진 히메쨩, 루돌프씨와 야누아씨, 토이펠씨와 토류까지 모두를 만났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복잡했던 머리도 차분히 정리가 되어갔다. ―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아직도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 로스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결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제 밤새도록 고민했지만 마땅한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아마, 이미 그 결론은 나와 있으니까, 나는 그 결론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얼굴을 안 본지 만 하루 만에 드디어 로스를 만나는 날이다. 응,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이상한 말이지만 아무리 긴장되어도 로스를 생각하면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분명 로스와 함께 하면 괜찮을 것이다.

"아, 알바씨!"
"린쨩?"

 인파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손을 번쩍 들면서 인사를 하더니 씩씩하게 인파를 헤치고 알바의 앞까지 힘겹게 당도하였다.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를 벗은 채 나타난 린은 평소의 캐주얼한 복장이 아니라 루키가 공식석상에서 입는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린, 알다시피 루키의 동생이다. 루키에 비해도 마력이 너무 약한 탓에 보통 인간처럼 지내도 문제없을 정도라고 여겨지고 있다. 덕분에 인간계의 학교도 무사히 졸업하고 인간들 사이에도 위화감 없이 적응하고 있다. 지금은 용사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 인간계와 마계를 넘나들며 여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어라, 어째서 뒤에 물음표가 붙는 걸까.."
"아, 역시 결혼 맞죠? 언니가 급하게 내일 당장 마계로 오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알바씨가 결혼한다고해서, 설마 두 분이서 결혼 하실 줄은 몰랐어요."
"어, 어라!! 처음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던 정상적인 대답이 나와 버렸다!!"
 
어제 만난 사람들은 전부 나랑 로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어서 알바는 그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질식당해 태클조차 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린의 정상적인 반응에 오히려 알바가 당황해서 태클을 걸 정도였다.

"게다가 원래 제가 받은 청첩장에는 알바에게는 이 내용을 비밀로 할 것이라고 써져 있어서...."
"나도 어제 알았으니까...다들 비밀은 잘 지킨 모양이네"
"어제!!? 결혼하는 당사자가 어제 결혼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요!?"

 린의 연속적인 태클에 알바는 조금 뭉클한 기분마저 들었다.

"린쨩, 조금만 더 크면 내가 제자로 받아줄게."
"에, 그건 싫은데요."
"0.2초 만에 거절당했다!?"

 예전에 로스가 아마 저 아이는 앞으로 용사씨의 뒤를 이을 용사가 될 수도 있어요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왜 그런지 이해는 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린쨩에게는 용사(태클)의 재능이 있다. 같이 다니는 두 친구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태클 기술은 날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태클 중에서도 격이 다르다고 하는 셀프 태클을 연마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주로 감옥 안에서 셀프 태클을 연마해왔다. 아, 일단 용사가 되려면 감옥에는 최소 3번 이상 들어가 봐야 한다. 린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레이크랑 솔도 오면 좋았을 텐데...."
"어라, 둘은 안 오는 거야?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어제 연락했는데 둘 다 중요한 일이 있어도 못 온다고 해서.."
"급한 일이면 어쩔 수 없지."
"마마랑 파파도 곧 오실거에요. 양 가 부모님을 모셔온다고 하셨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부모님들도....부모님들도 오시는구나!!!"
"그야 자식의 결혼식이니 오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 진짜 결혼식이었다. 부모님이 오는 것은 당연했다. 어라, 부모님한테는 어떻게 설명 드려야지라고 당황했지만 일단 우리 부모님은 내가 용사가 되어서 수감되었을 때도 그렇구나~라고 넘길 정도의 사람이니 아마 괜찮을 것이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기, 그 부모님이 오신다는 건 나랑 로스의 부모님이지?”
“그러고 보니 레이크네 어머니는…”

 거기서 나와 린은 동시에 침묵을 지켰다. 로스의 어머니이자 레이크의 어머니인 시실리씨는 어렸을 적에 있었던 사고 때문인지 자식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했다. 만일 내가 로스와 결혼식이라도 올린다는 것을 안다면…

“결혼식이 장례식……”
“아, 아직 그렇게 결정된 거 아니니까요!?”

 루키가 말한 영정사진이란 게 혹시 이걸 의미하는 거였나. 시실리씨가 오기 전에 도망을 가는 편이 낫질 않을까 했지만, 감히 시땅을 혼자 두고 도망치다니~라는 전개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다.

“아, 그래서…”

 린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레이크랑 솔이 레이크네 마마의 폭주를 막기 위해 같이 있는지도 몰라요.”
“어, 그러고 보니…”
 
 확실히 어제 만난 크레아씨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불꽃놀이를 배우고 있을 줄 알았던 크레아씨였지만, 지금은 또 다시 사랑과 자유를 찾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했다. 결혼식 얘기를 꺼내자 축하한다며 알바의 등을 두드리더니 본인은 아쉽게도 참가할 수 없다고 사과를 했다.

‘로스가 혹시 크레아씨한테는 초대를 안 한 것은 아니겠죠?’
‘후훗, 알바군. 남자는 말이야, 지키고 싶은 것을 꼭 지켜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
‘나는 가장 소중한 친구들의 결혼식을 위해 전력투구할거니까! 두 사람은 걱정할 필요 없어!’

 라는 것이 어제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더 묻기도 전에 미안하지만, 내일의 준비를 해야 해서 바쁘다고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붙잡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아마 로스가 사전에 크레아씨와 레이크, 솔에게 부탁한 것 같지만, 잘 풀릴지는 의문이다. 여기까지 준비한 게 로스답다면 로스다움 걸까, 새삼 로스의 행동력에는 감탄만이 나왔다.

“아, 알바씨, 알바씨도 얼른 준비하러 가셔야해요!"

 언니 부탁을 받고 알바씨를 찾으러 나온 거였어요! 라면서 허둥지둥 알바의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알바를 이끌었다. 린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면서 이미 로스씨는 준비가 끝났어요, 라는 말을 듣고 저절로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 * *

 성 안은 밖보다는 덜했지만 시끄러웠다. 분주히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장식을 다는 마족들과 벽면에 꽃을 장식하고 있는 메이드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있을 알바와 로스의 결혼식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늘 오던 마왕성이었지만 고급스럽게 깔린 카페트에, 화환들까지 곳곳에 배치된 탓인가 알바의 긴장감은 더 고조되고 있었다. 린 역시 처음 보는 광경에 마왕성이 생긴 이후 처음이 아닐까라면서 냉정하게 감상을 늘어놓았다.

“아, 저기에요. 대기실. 로스씨도 저기에 계세요. 저는 그럼 언니한테 가 봐야 해서.”

 린은 대기실이라고 써진 문까지 알바를 안내하고는 어느새 온 방향과는 반대로 뛰어 가버렸다. 알바의 눈앞에는 보기에도 육중한 거대한 문이 있었다. 이런 문이 원래 마왕성에 있던가 싶었지만 보나마나 루키가 마법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그 마음은 기쁘지만, 지금 이 문 너머에 있을 인물을 생각하면 쉽사리 손잡이를 돌릴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내뱉을 정도로 쉬운 말은 아니었다. 그 전에 일단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럼 평소처럼 이게 무슨 짓이냐!? 결혼식이라니, 이런 대형 사고를 치면 어떻게!? 라면서 태클을 걸면서 들어가야 할까. 아니면, 침착하게 로스, 오늘 결혼식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라면서 냉정하게, 어라 어느 쪽도 똑같지 않나?

 한동안 문 앞에서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멈칫거리고 있자 반대로, 문이 안 쪽에서 열렸다. 부드럽게 열린 문 틈 사이로 등장한 인물은 역시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늦어요, 덕분에 결혼식 시작이 늦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혼식에 지각하다니 제 정신입니까, 아 맞다 계란 노른자보다도 지능이 없는 용사씨에게 제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보네요"

"기껏 하루 만에 다시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독설……."

 로스를 만나기까지 긴장했지만 막상 본인을 직접 만나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거기에는 로스가 있었다. 알바가 잘 아는 로스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거릴 정도로 멋지게 차려입었다는 것이다. 구두부터 시작해서 로스에게 딱 맞춘 듯한 정장, 로스의 눈 색과 같은 붉은 색의 넥타이. 역시 로스는 잘생겼구나, 라고 무심코 내가 중얼거리자, 이제 알았냐며 로스는 안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젖혀주었다.

“대기실 내부는 평범하구나..”
“예산부족입니다. 외부에는 엄청 돈을 쓴 모양이던데요.”
“엑, 마법이 아니라?”

 알바의 말대로 대기실 내부는 알바가 잘 알고 있던 마왕성의 내부였다. 아마 비어 있는 방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나마 결혼식 분위기를 낸다고 천장에는 꽃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마 루키가 다른 마족들이랑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만들지 않았을까.

“용사씨, 루키는 마법이 그렇게 능숙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게이트 마법이나 게이트 마법밖에 못 쓰는걸요.”
“게이트 마법이라고 2번씩이나 강조할 필요는...”
"그것보다도 용사씨, 얼른 옷이나 갈아입으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로스가 뒤에서 바퀴달린 옷걸이를 질질 끌고 나왔다.

'참고로, 알바씨 드레스는 정말 굉장해! 주문 제작이야!‘

 아 맞다, 정작 내가 입어야 할 의상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의상은 확실히 웨딩드레스였지만 보통의 웨딩드레스와는 달라 보였다. 살짝 웨딩드레스를 만져보니 촉감이 부드럽다 못해 너무 옷감이 얇아서 입다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이걸 입으라는 건가.

"일단 예의상 묻겠는데, 이 의상 이외에 다른 의상은…?"
"역시…용사씨는 알몸이 좋으신,"
"절대 아니야. 응. 역시 이거 입을게."

 용사로서 단련된 직감은 써먹을 데가 많았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길을 피한다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음식이라도 독이 들어있는 여부를 감으로 판단하는 적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이 직감을 써먹을 수 있는 건 역시 로스의 무시무시한 함정을 피해갈 때라고 생각한다. 알몸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 별로 내키지 않긴 하지만.

 내가 여전히 멈칫거리면서 드레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자, 로스는 초조하다는 듯이 방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청첩장에 표기된 결혼식 시작 시간은 아마 11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10시 반. 앞으로 30분. 분명 그렇게 길지 않는 시간이다. 드레스를 갈아입는데 필요한 용기가 5분, 막상 입는 것은 마법으로 어떻게든 애를 쓰면 1분으로 단축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혼식의 진행방식을 로스에게 묻고 머릿속에 꾸깃꾸깃 정리하는 시간을 5분, 그러면 내가 로스와 이 대기실에서 단둘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20분, 결혼식 입장 전에 미리 대기 해야 할 테니 그 시간 5분을 빼면 다시 15분.

"저기, 로스"
"별로 알몸으로 나간다고 해도 히익, 하고 놀리지는 않겠습니다. 아마 식이 끝나고 풍기문란으로 감옥에 들어갈 수는 있겠죠.“
“로스.”
“아, 이참에 감옥에서 식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용사씨 좋아하시잖아요, 감옥”
“감옥은 안 좋아하는데다가,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그 말을 꺼내자 로스는 반사적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시 한 번 시간을 점검하더니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며 대꾸했다. 방에는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 그리고 밖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대화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았다. 긴장되는 지 땀에 손이 가득 고였다. 목도 따가웠다. 이건 분명, 어제 태클을 너무 많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로스, 나 어제 하루 종일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왔는데, 다들 내가 너랑 결혼하는 거에 대해서 하나도 안 놀라더라고.”

 로스는 내 쪽을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방안에 걸려있던 벽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이 결혼식도 나를 놀리기 위한 결혼식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너를 말릴 수 있을까 무진장 고민했어.”

 로스는 아까부터 조용했다. 내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은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 집에 나 밖에 없었어. 이거 우리가 거기서 살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였던 것 같은데, 기분이 되게 이상하더라. 늘, 로스가 있었는데, 어제는 로스가 없어서 조금 이상했어.”

 어제 집에 돌아가서 계속 생각하던 게 있다. 사실 오늘 성에 도착하고 나서도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로스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 같다.

“크레아씨도 루키도,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있어서 정말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야. 만약,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든 모두를 구하려고 할 거야.”
“그야, 용사씨니까요.”
“응, 로스. 난 용사야. 그러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구해 줄거야.”
“당연하잖아요.”

 로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겠지.로스가 원하는 대답, 내가 원하는 결말.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용사가 구한 공주님이 어떻게 되는 지, 아 물론 로스는 공주는 아니다. 애초에 그 동화들은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그 동화의 용사도 내가 아닌걸.

“…계속 기다렸으니까요”
“어, 잠깐만, 로스 내가 먼저 말하게,”

 내가 먼저 말하게 해달라는 말은, 로스의 강력한 오른팔 스트레이트에 막혀버렸다. 평소라면 이것보다는 살살 때렸을 텐데, 오늘은 용서가 없구나, 로스! 그것도 그렇지만 완전히 긴장을 느슨하게 한 탓에 로스의 직격타를 피하지 못했던 내 탓도 있다. 바로 얼굴에 고통을 완화하는 마법과 회복 마법을 걸자, 로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찼다. 네가 가르쳐 준 마법이거든!?

“눈을 떠보니, 천년이 지나있었고,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는가 하면 당신이 갑자기 용사가 되어있질 않나, 마왕은 쓰러뜨리고, 크레아를 구해버리고. 그리고 이제는 나의 어머니와 형도 찾아주었습니다. 분명, 저는 기다리고 있던 거죠. 천 년 동안. 검의 모습으로 마왕을 봉인하고 있었을 때부터 쭈욱, 당신을 만나기 위해 천년동안 그곳에 있었던 거라고 지금은 믿고 있습니다.”

로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조용히 로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막 용사가 되었을 때도, 다시 재회했을 때도, 같이 레이크와 솔을 구해내기 위해 작전을 짤 때도, 로스가 계획을 짜면서 설명하던 그 목소리였다. 나에 대한 신뢰와 앞으로 벌어진 일들에 대한 확신감이 가득찬 로스의 그 목소리를 나는 좋아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부러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작 몇 년, 아무것도 없었던 그 때에 비하면 기다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닙니다.”

 로스의 목소리뿐만 아니다. 사실은 다른 점도 좋아한다. 어른스러운 척하는 주제에 사실은 어린애같이 고집이 센 점도, 의외로 어린애들한테 상냥한 점도, 귀찮은 듯 하면서도 지나가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 없는 용사 기질도.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 생일 축하해라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선물만 내미는 그 서툰 모습도, 말로는 늘 욕하면서도 사실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생각해주고 있는 점도 전부, 전부 좋아한다.

“용사가 된 당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당신의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크레아도, 가족들도 친구들도 있습니다. 제 세계를 당신이 구해줬으니 저는 이제 거기서 계속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로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아무런 근심 없이 그저 내일이 오는 것을 즐겁게 기다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나는 그걸 위해 용사가 된 거니까. 로스를 구하기 위해서, 로스의 세계를, 로스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용사가 되었다. 분명,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내가 죽을 때까지.

“…무서워졌습니다. 너무 행복하니까, 오히려 불안해졌던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역시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면서, 언젠가 이 생활이 끝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결혼해서 새롭게 가정을 꾸려도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죠.”
“저기, 로스”
“사람이 말 하고 있는데 멋대로 끊지 마십시오, 이 바보 용사가”
“그렇지만 이대로 로스가 계속 말하다간 결혼식 시간에도 늦을 것 같고, 왠지 로스 목소리가 울 것…”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내 복부를 향한 로스의 묵직한 발차기가 날라왔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 복부를 강타하기 전에 로스의 발을 내 손으로 막았다.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로스.”
“잠깐, 멋대로 이야기 진행하지…”
“좋아해, 로스. 나랑 결혼해줄래?”

 라고 해도, 벌써 오늘이 우리 결혼식이긴 한데라면서 멋쩍게 덧붙이자 로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아마 저 머리 세팅하는데 몇 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로스가 조용히 바보 용사씨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상 내뱉고 보니 온 몸에 피가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수로 루키의 게이트로 엉뚱한 데 떨어지는 바람에 화산 근처에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때만큼 온 몸이 뜨거운 것 같다. 심장이 너무 두근두근 거려서 로스가 뭐라고 말을 한다면 잘 안 들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마법으로, 1분이라도 심장을 멈추고 싶을 정도였다.

"바봅니까, 그러면 죽습니다. 기껏 사람이 인생을 걸고 살려준 목숨을 그딴 멍청한 방식으로 낭비할 생각입니까?
"어라, 지금 나 입 밖으로 말했던가."
"아뇨, 용사씨 생각은 어차피 지나가던 바퀴벌레보다 수준이 낮아서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도 계란 노른자보다는 바퀴벌레가 나으려나?“

 나도 로스도 아까까지는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었는데 어느 새인가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었다. 말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내가 미소를 짓자, 로스가 뭘 그렇게 실실 쪼개냐며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결국 로스도 웃어버렸다.

“알바씨, 저랑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응, 나도 평생 로스를 지켜줄게. 로스의 용사로서.”
“폼 잡지 마십시오, 이 갈비뼈맨이”

 로스는 여전히 민망한지 내 갈비뼈를 향해 촙을 날렸다. 공격을 피한 건 좋은데, 아무래도 바닥에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에 발이 걸렸는지 엄청난 기세로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

 로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내가 깨달은 것은, 지금 내 손에 굉장히 하늘하늘한 옷감이 걸려있다는 것과 루키 말대로 이 옷이 내 수의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무언가를 잡는 다는 게 근처에 있던 웨딩드레스를 붙잡은 모양이다. 약한 재질로 되어있던 웨딩드레스는 살짝 잡아당긴 것만으로 형태를 잃어버렸다.

"로스, 미안!!!"
"주문 제작기간만 3개월이 걸린 물을 부으면 녹아버리는 투명한 웨딩드레스를 입기도 전에 망쳐버리다니, 굉장한 배짱이네요, 용사씨."
"마법으로 내가 고쳐볼게, 고치면 되겠지? 그러니까 물을 부으면 녹아버리는 투명..잠깐, 왜 웨딩드레스가 물을 부어서 녹아 버리는 거야!!"
"그거야 결혼식 행진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용사씨 한테 물을 끼얹을 예정이었으니까!"
"좋은 표정이다! 그거 절대 안 괜찮은 거든!!"
"쳇, 감은 좋아가지고. 이래서 용사씨가 늘 아바라맨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아닙니다만!?"

 로스는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제 농담할 시간도 없을 것 같네요 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로스도 긴장하고 있었다. 로스는 넘어져있던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멍청한 표정 짓지 말고 얼른 가자고요, 응, 나는 망설임 없이 로스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갈까, 로스"
"어라, 용사씨 웨딩드레스가 없어졌으니까 알몸으로 가는 겁니까?"
"그건 좀 사양하고 싶습니다!"

 이제 이 문을 열면, 나와 로스의 결혼식이다. 로스는 멋지게 양복까지 차려입었지만 나는 평소 복장 그대로라 조금 민망한 기분도 든다. 역시 마법으로 웨딩드레스라도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굳이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맞출 겸, 하얀색 망토를 마법으로 만들어내자 로스는 나쁘지 않네요 라며 나에게 자신의 스카프를 건네주었다. 역시 꼬리가 없으면 이상하니까요, 라며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직접 자신의 스카프를 내 벨트에 매주는 로스의 귀는 새빨간 색이었다. 역시 내 전사는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하얀 망토에 붉은 색 꼬리. 이런 복장은 또 오랜만이다. 로스는 역시 잘 어울리네요, 라면서 보기 드물게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로스의 손이 조금 차가웠다. 아마 긴장을 해서 그렇겠지. 반면 내 손은 땀투성이다. 잡은 손을 꽉 쥐듯 힘을 주자 로스도 그대로 내 손을 꽉 쥐어 주었다.

"그럼, 결혼해볼까?"
"결혼해주십시오, 로스님이라고 머리를 조아리면 해드릴게요"
"너 말이야..."

 로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부루퉁한 표정의 마왕이 노닥거리자말라며 화를 내며 얼른 식장으로 들어가라며 우리 두 사람의 등을 밀었다.

“알바씨, 로스씨가 원했던 대답 제대로 말해준거지?”

 내 망토를 보고 감탄한 루키는 로스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한쪽 손을 여우 모양으로 만들었다. 루키는 만족스러운 지 한 쪽 여우처럼 만들더니 가볍게 나와 손을 부딪쳤다.

“그럼,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루키의 신호를 기준으로 양 옆에서 팡하는 소리와 함께 크래커가 터지기 시작했다. 우리 둘의 결혼식의 막이 올랐다.

내가 읽었던 용사 이야기는 죄다 순 엉터리뿐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들어맞는 사실이 있다면, 용사는 언제나 행복한 결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분명 나와 로스의 이야기도 해피엔딩으로 끝날게 분명하다. 아직 나는 용사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아직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진행해야 할 연구도 아직 많다. 설사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옆에는 분명히 로스가 있다. 알고 있잖아?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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